느린 노인
유진은 경공에 자신이 있었다.
유가장에서 자라는 동안 그녀가 이겨 본 적 없는 것은 많았다. 적자인 오라비들의 이름값, 아버지의 눈길, 집안 어른들의 귀. 그러나 담장 위에서만큼은 늘 이겼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는 일이라면, 오라비 셋을 한꺼번에 따돌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숙소 지붕에 내려서자마자 발끝으로 기와를 찼다.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 맞은편 지붕, 그 너머 담장, 그 너머 무창 시가의 첫 기와지붕. 세 번의 도약으로 그녀는 본산 담장을 넘었다.
그림자가 저 앞에 있었다.
보자기를 진 그림자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지붕 용마루를 따라, 마치 평지를 걷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거리가 줄지 않았다.
유진은 숨을 들이쉬고 속도를 올렸다.
기와가 발밑에서 연달아 스쳐 갔다. 바람이 귀를 때렸다. 그녀는 지붕과 지붕 사이의 골목을 두 칸씩 건너뛰었다. 이 정도면 오라비들은 진작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거리가 줄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림자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뛰지도 않았다. 등에는 사람 키보다 높은 보자기를 지고 있었다. 그런데 유진이 열 걸음을 좁히면, 그림자도 열 걸음을 앞서 있었다.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내공을 다리로 끌어내렸다. 기와 하나가 그녀의 발끝에 깨져 나갔다.
그러자 그림자가 처음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가 쪽이 아니었다. 강 쪽이었다. 지붕이 낮아지고, 골목이 넓어지고, 집들 사이가 성글어지는 쪽.
유진은 따라갔다. 그림자가 한 집의 지붕에서 다음 집의 지붕으로 건너갔다. 유진도 건너갔다. 그림자가 다시 다음 지붕으로 건너갔다. 유진도.
그리고 그림자가 사라졌다.
유진이 마지막 지붕 끝에 섰을 때,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지붕이 없었다. 지붕 아래는 강둑으로 이어지는 비탈이었고, 그 아래로 시커먼 물이 흘렀다.
막다른 지붕이었다.
멈추려 했다. 그런데 너무 빨랐다. 발끝이 기와 끝에 걸렸다. 낡은 기와가 그녀의 무게를 못 이기고 미끄러졌다.
몸이 허공으로 기울었다.
'아―'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크고 거친 손이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겹겹이 앉아 있었다. 그 손이 그녀를 가볍게, 너무 가볍게 끌어 올렸다. 유진의 발이 다시 기와를 밟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 검은 두건, 얼굴 아래를 가린 천. 그 위로 눈 두 개가 보였다. 화난 눈도, 웃는 눈도 아니었다. 조용한 눈이었다.
"이 지붕은 기와가 낡았습니다."
천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손목을 놓았다.
유진이 눈을 깜빡였을 때, 그림자는 없었다. 발소리도, 기와 소리도 없었다. 보자기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유진은 지붕 위에 혼자 서 있었다. 손목에 아직 그 손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강바람이 땀에 젖은 목덜미를 식혔다. 그녀는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잡혔던 자리에 아무 자국도 없었다. 그렇게 세게 끌어 올렸는데도, 아프지 않게 잡았던 것이다.
추가찻집 뒤 창고에 마지막 보자기가 내려졌다.
허평은 숨을 고르지도 않았다. 보자기를 풀어 해마다 쌓은 묶음 끝에 마저 얹었다. 그리고 등에서 따로 내린 상자 하나를, 창고 맨 안쪽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봉인된 끈이 그대로였다. '흑수곡 인근 민원 ― 폐기.'
그는 그 상자를 잠깐 보았다. 그리고 창고 문을 잠갔다. 녹슨 열쇠가 삐걱 돌아갔다.
동이 막 트려 할 무렵, 무창 시가 약방의 덧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졸린 눈의 약방 주인이 문을 열자, 반백의 노인이 허리를 짚고 서 있었다.
"허리에 붙이는 고약 두 장 주십시오."
"어디 삐끗하셨소?"
"이사를 했습니다."
노인은 잠깐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제일 냄새 나는 걸로요."
아침이 밝았다. 그믐이었다.
본산 소각장에서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민원실 창문으로도 그 연기가 보였다. 곽 주임은 창가에 서서 그것을 오래 보았다.
"…다 탔구먼."
그가 중얼거렸다. 열아홉 해 동안 '검토 중'을 찍은 손으로 창틀을 쥐고 있었다.
서고 쪽에서 마 영감이 지나가며 말했다. 귀가 어둡다는 노인이 혼잣말처럼.
"다는 아니오."
곽 주임이 돌아보았다. 마 영감은 이미 서고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텅 빈 서고였다.
그 뒤를 이어 주판 소리가 들어왔다. 탁, 탁, 탁.
"여러분! 9할 2푼입니다!"
왕 부총관이 손목에 천을 감은 채 들어와 벽의 두루마리 맨 끝 칸에 커다랗게 숫자를 적었다. 붉은 먹이 뚝뚝 떨어졌다.
"맹 전체에서 꼴찌였던 부서가, 보름 만에! 장로님들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재정각 주 장로님은 벌써 물으시더군요. 보름 만에 어떻게 이런 숫자가 나왔느냐고. 하하, 놀라신 거지요."
곽 주임이 맥없이 웃었다. 왕 부총관은 숫자를 한 번 더 쓰다듬듯 바라보고는, 흡족하게 나갔다.
문이 열리고 유진이 들어왔다. 눈 밑이 거뭇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민원실 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허평이 들어왔다.
허평은 허리를 짚고 있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다. 회색 무명옷 허리춤 아래로 무언가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고약이었다. 큼직한 고약 두 장이 허리에 붙어 있었다.
"아이고."
허평이 의자에 앉다가 신음을 냈다.
곽 주임이 혀를 찼다.
"허 서기, 허리는 또 왜 그래?"
"어제 이사를 좀 했습니다."
"이사? 숙소에서 숙소로?"
"짐이 좀 많아서요."
유진이 허평을 보았다.
아주 오래, 아주 자세히 보았다. 반백의 상투. 마른 얼굴. 허리에 붙은 고약. 손. 그녀는 허평의 손을 보았다. 크고 거친 손이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을 것이었다. 장작을 팼다고 했으니까.
어젯밤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손도 크고 거칠었다.
유진의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아저씨."
"예."
"어제 밤에 뭐 하셨어요?"
"이사요."
"밤에요?"
"밤에 하는 게 덜 덥습니다."
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맞아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지붕 위의 그림자. 보자기. 손. 정의검문 사건 다음 날 침을 흘리며 자던 얼굴. '제가 직접 돌려드리고 오겠습니다.'
설마.
"설마요."
유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허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이 설마입니까?"
"아니에요. 그냥…"
그때 허평이 일어섰다. 차를 따르러 가려는 것 같았다. 허리를 짚고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민원실 문지방에 발이 걸렸다.
허평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찻잔이 굴러갔다. 허평은 바닥에 엎드린 채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고."
곽 주임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진은 벌떡 일어나 허평을 부축했다. 허평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 겨우 일어서며 말했다.
"문지방이 높군요."
"…원래 이 높이였어요."
"그렇습니까."
유진은 허평을 의자에 앉혀 주었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한숨을 쉬었다. 이마를 짚었다.
'설마는 무슨.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무슨.'
그녀는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깨끗이 지웠다. 어젯밤의 그 사람은 지붕 위를 바람처럼 걸었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쉰다섯 살 서기가 아니었다.
허평은 의자에 앉아 허리를 두드렸다. 그 얼굴은 여전히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서고 문틈으로 마 영감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노인의 수염이 아주 조금, 떨렸다. 웃음을 참는 것인지, 다른 것을 참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민원실에 한 여인이 찾아왔다.
서른 남짓, 삯바느질하는 손이었다. 옷은 깨끗했지만 몇 번이나 기운 자국이 있었다. 그녀는 창구 앞에 서자마자 말했다.
"아들을 찾아 주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며칠 동안 울고 또 운 목소리였다.
허평이 민원서 양식을 꺼냈다. 여인은 글을 몰랐다. 허평이 받아 적었다. 유진이 옆에서 그 지렁이 글씨를 몰래 고쳐 적었다.
여인은 탁씨댁이라 했다. 아들의 이름은 탁원. 열두 살.
열흘 전 장날이었다. 탁원은 장터에서 나무 막대기로 칼싸움 흉내를 내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한 문파의 무사들이 아이를 유심히 보더니 말을 걸었다. 재능이 있다고 했다. 문파에서 거두어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저한테 은자도 주고 갔어요. 입문 축하금이라고. 저는… 저는 그게 좋은 일인 줄 알았어요."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소식이 없어요. 한 번 보러 가도 되냐고 물어보려고 그 문파에 갔더니, 그런 아이는 없대요. 들어온 적도 없대요."
"집법전에는 가 보셨습니까?"
유진이 물었다. 무림 규율을 집행하는 곳이 집법전이었다. 아이를 데려간 문파가 거짓말을 한다면, 집법전이 나서야 했다.
"갔어요."
여인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집법전의 답변이었다. 짧았다.
[문파의 입문은 자유. 접수하지 않음.]
유진이 그 종이를 쥔 손을 떨었다.
"입문이 자유라니요. 아이가 사라졌는데."
허평은 민원서를 끝까지 받아 적었다. 그리고 붓을 내려놓고 물었다.
"아이를 데려간 문파 이름이 무엇입니까?"
여인이 대답했다.
"백학문이요. 북쪽에 있는, 큰 문파요."
곽 주임이 차를 마시다 멈췄다. 찻잔을 내려놓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백학문이라…"
"아십니까?"
유진이 물었다.
곽 주임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까 내 말은~ 백학문은 하씨 가문이 대 주는 문파야. 하씨 가문이 누구 집안인지 알지?"
유진이 숨을 들이켰다.
집법전을 맡은 장로. 하문겸.
"…그래서 접수를 안 한 거예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허평은 집법전의 답변이 적힌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문파의 입문은 자유.' 반듯한 글씨였다. 법조문처럼 딱딱한 글씨.
그는 그 종이를 민원서 위에 겹쳐 놓았다. 그리고 탁씨댁을 보았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탁씨댁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민원실에 처음 온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두 손을 모으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곽 주임은 습관처럼 서랍 쪽으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 '검토 중' 도장은 장연이의 편지가 붙은 날부터 서랍 안에 있었다. 그는 뻗은 손으로 괜히 찻잔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