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리율 9할
처리율 개선안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왕 부총관은 먼저 민원실 벽에 두루마리를 걸었다. 어록 액자의 반대편 벽이었다. 두루마리에는 날짜별로 칸이 그어져 있었고, 맨 위에 붉은 글씨로 크게 적혀 있었다.
[목표. 9할.]
그 아래 오늘 날짜 칸에는 '1할 미만'이라고 쓰여 있었다.
"매일 저녁 이 칸을 채웁니다. 숫자가 올라가는 걸 눈으로 보는 겁니다. 사람은 눈으로 봐야 움직이거든요."
탁, 탁, 탁.
그다음은 보고서였다. 왕 부총관은 새로 찍어 온 양식을 한 묶음씩 나눠 주었다. 칸이 빼곡했다. 날짜, 담당, 접수 건수, 반려 추천 건수, 처리 건수, 그리고 맨 아래에 처음 보는 칸이 하나 있었다.
[첩자 신고 접수 건수.]
유진이 그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부총관님, 이건 뭐예요?"
"아, 그거요! 이번 봄부터 총관부가 현천교 첩자 신고를 받지 않습니까. 신고 창구를 어디 둘까 하다가, 민원실 창구가 비어 있더군요. 그래서 여기서 받기로 했습니다."
왕 부총관이 주판을 튕겼다.
"첩자 신고는 접수만 해도 처리로 칩니다. 처리율에 아주 좋지요."
"확인은요?"
유진이 물었다.
"예?"
"신고가 맞는지 확인은 누가 해요? 첩자라고 신고만 하면 그 사람은…"
"확인은 총관부가 합니다."
왕 부총관은 웃으며 대답했다. 탁. 주판알 하나가 넘어갔다.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됩니다. 받으면 숫자가 올라갑니다. 숫자가 올라가면 다들 좋습니다. 간단하지요?"
허평은 그 칸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은 할당량이었다.
"반려 도장은 제가 찍습니다. 여러분은 반려할 민원을 골라서 가져오시면 됩니다. 하루에 한 사람당 쉰 건."
"쉰 건이요?"
곽 주임이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서고에 십 년 넘은 민원이 몇천 건입니다. 이달 말까지 다 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요. 자, 시작!"
그렇게 민원실의 가장 이상한 열흘이 시작되었다.
첫째 날, 곽 주임은 서고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자기 책상에서 빈 양식에 도장을 찍었다. 한 장, 두 장, 열 장. 저녁이 되자 반려 추천 쉰 건이 쌓였다. 왕 부총관이 흡족하게 넘겨보다가 손을 멈췄다.
"곽 주임, 이거 다 빈 종이 아닙니까?"
"…양식을 미리 채워 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민원서는 내일 붙이려고."
"아, 미리! 준비성이 좋으시군요."
왕 부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곽 주임은 그가 나가자마자 그 빈 종이들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유진은 서고에 들어갔다가 한 시진 만에 나왔다. 빈손이었다.
"못 하겠어요."
그녀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한 장 한 장 다 읽어 봤는데, 반려할 게 하나도 없어요. 다 진짜 피해예요. 그걸 어떻게 돌려보내요."
곽 주임이 코를 긁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유 서기, 그걸 읽으면 안 돼. 읽으면 못 돌려보내. 그래서 내가 십구 년 동안 안 읽은 거야."
"…그게 자랑이에요?"
"자랑 아니라니까. 요령이지."
곽 주임은 웃었지만, 웃음 끝이 조금 씁쓸했다. 그는 벽에 붙은 장연이의 편지를 한 번 쳐다보고,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읽으셨군요."
허평이 말했다.
"당연히 읽었죠. 안 읽고 어떻게 골라요."
"그렇지요."
허평은 그 말만 하고 자기 보고서를 썼다.
허평의 보고서는 그날 저녁 반려되었다.
"허 서기, 이게 뭡니까?"
왕 부총관이 보고서를 들어 올렸다. 칸마다 무언가 적혀 있긴 했다. 다만 그것이 글자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한 일입니다."
"한 일이 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게 '반려'입니까, '방석'입니까?"
"'반려'입니다."
"다시 써 오세요."
둘째 날, 허평은 보고서를 다시 써 갔다. 더 천천히, 더 정성 들여 썼다. 왕 부총관은 그것을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거꾸로 돌려 보았다. 그리고 다시 바로 돌렸다.
"…어제보다 더 못 알아보겠습니다."
"천천히 써서 그렇습니다. 빨리 쓰면 조금 나아요."
"다시."
셋째 날도 반려되었다.
허평은 반려 도장이 세 개 찍힌 보고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글씨가 칼보다 어렵군요."
유진이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칼은 써 보셨어요?"
"…장작 팰 때요."
"그거랑 같아요?"
"비슷합니다. 둘 다 잘 안 됩니다."
유진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대신 써 드릴게요. 불러만 주세요."
허평이 불렀다. 유진이 받아 썼다. 반듯하고 단정한 글씨가 칸을 채워 나갔다. 그런데 몇 줄 쓰다 말고 유진이 붓을 멈췄다.
"아저씨, 반려 추천이 영 건이잖아요."
"예."
"사흘 동안 한 건도 안 고르셨어요?"
"고를 게 없어서요. 유 서기 말대로, 다 진짜 피해더군요."
유진은 그를 한참 보다가, 다시 붓을 들었다. 그리고 '영' 자를 또박또박 적었다.
닷새째 되는 날, 처음으로 그 칸에 숫자가 생겼다.
오후 무렵 창구에 비단 장사를 한다는 사내가 찾아왔다.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첩자 신고는 여기서 받는다고 해서요."
마침 민원실에 들러 있던 왕 부총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곽 주임을 밀어내다시피 하고 창구에 앉았다.
"예, 예! 여기서 받습니다. 누구를 신고하십니까?"
"우리 골목 끝에 새로 이사 온 국숫집 말이오. 말씨가 서쪽 말씨요. 밤늦게까지 불을 켜 두고. 수상하지 않소?"
"수상하지요! 아주 수상합니다!"
왕 부총관이 '접수' 도장을 집어 들었다. 그때 옆 책상에서 허평이 물었다.
"확인해 보셨습니까?"
사내가 허평을 보았다.
"뭘 말이오?"
"그 국숫집이 첩자인지요."
"…말씨가 서쪽이라니까. 밤에 불도 켜 두고."
"국수 반죽은 보통 밤에 합니다."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왕 부총관이 손을 휘저었다.
"허 서기, 확인은 총관부가 한다니까요. 우리는 접수만! 자, 접수!"
탁. 붉은 도장이 찍혔다. 사내는 은 열 냥을 언제 받을 수 있느냐고 묻고는 흡족하게 돌아갔다.
그날 저녁 왕 부총관은 보고서 맨 아래 칸에 신이 나서 숫자를 적었다.
[첩자 신고 접수 건수. 1.]
"첫 건입니다! 이게 쌓이면 처리율이 쭉쭉 올라갑니다."
유진이 그 숫자를 보며 작게 말했다.
"그 국숫집 사람은요? 신고당한 줄도 모를 텐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허평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국수를 반죽하는 손들이 사는 무창의 저녁이었다.
벽의 두루마리 칸에는 그날도 '1할 미만'이 적혔다. 첩자 신고 한 건으로는 숫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왕 부총관의 주판 소리가 조금 느려졌다.
그날 저녁, 왕 부총관이 돌아가자 서고 문이 삐걱 열렸다.
마 영감이었다.
귀가 어둡다던 노인은 문간에 서서 허평을 보았다. 그리고 손짓을 했다.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유진은 이미 퇴근했고, 곽 주임은 책상에 엎드려 코를 골고 있었다. 허평은 조용히 일어나 서고로 들어갔다.
서고는 생각보다 깊었다.
민원실 뒤편의 창고였다. 문을 열자 먼지 냄새와 묵은 종이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리고 상자가 있었다.
천장까지 쌓인 상자였다. 나무 상자, 대나무 상자, 끈으로 묶은 종이 묶음. 벽을 따라, 통로를 따라,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졌다. 상자마다 귀퉁이에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검토 중.]
마 영감이 등잔을 들고 앞장섰다. 굽은 허리로 천천히 걸으며, 한 상자씩 손으로 짚었다.
"이건 열아홉 해 전 거요. 민원실 생긴 첫해."
노인의 목소리는 작고 갈라져 있었다. 혼잣말 같았다.
"비무장에서 소를 잃은 농부. 소가 놀라 강에 빠졌지. 밭을 못 갈아서 그해 겨울 딸을 남의 집에 보냈소."
다음 상자.
"문파 싸움에 불탄 서당. 훈장이 책을 다시 쓰다가 눈이 멀었소."
다음 상자.
"경공 연습하던 무사가 떨어뜨린 기왓장에 맞은 아이. 지금은 스물다섯이 됐겠군. 다리를 절고."
마 영감은 멈추지 않았다. 상자마다 사연이 있었고, 노인은 그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 날짜, 무엇을 잃었는지,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그때 다 '검토 중'을 찍었소. 곽 주임이 찍고, 내가 여기 넣었지. 열아홉 해 동안."
허평은 상자 사이에 서 있었다.
등잔 불빛이 닿는 데까지 상자였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도 상자였다.
그가 세운 맹이었다. 백성의 방패가 되겠다고 했던 맹. 그 맹이 열아홉 해 동안 쌓은 것이 이것이었다. 수천 장의 '검토 중'. 수천 개의 무너진 지붕, 잃어버린 소, 불탄 책, 절름거리는 다리.
'방패가 무거워진 게 아니었군.'
허평은 가까운 상자 하나에 손을 얹었다. 먼지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방패 뒤에 아무도 없었던 거야.'
마 영감은 더 말하지 않았다. 등잔을 든 채 허평의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오래, 오래.
한참 뒤 허평이 입을 열었다.
"…다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 기억하니까."
노인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믐 전날이었다.
아침에 왕 부총관이 민원실 문에 공문 한 장을 붙였다. 붉은 총관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알림. 처리율 개선안에 따라, 서고의 십 년 넘은 민원은 모두 반려로 일괄 처리하였음. 반려된 민원 서류는 보관할 필요가 없으므로, 내일 아침 소각장에서 소각함. ― 총관부 부총관 왕.]
곽 주임이 공문을 읽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 소각? 일괄 반려라니, 그 많은 걸 언제 다…"
"어젯밤에 제가 다 찍었습니다!"
왕 부총관이 손목을 주무르며 웃었다. 손목에 천이 감겨 있었다.
"밤새 도장을 찍느라 손목이 나갔지만, 보람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숫자가 9할을 넘습니다. 9할!"
탁, 탁, 탁.
유진이 공문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곽 주임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서고 문 안쪽에서 마 영감이 공문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허평은 공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두 번 읽었다.
그리고 서고 문을 보았다. 그 너머의 상자들을.
'내일 아침.'
창밖에서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믐을 하루 앞둔 밤은, 달이 거의 없을 것이었다. 지붕 위를 걷기 좋은 밤이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옮기기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