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민원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음력 사월 보름. 동이 트기 전이었다.
본산 뒤편 언덕 꼭대기에 허평이 서 있었다. 하급 직원 숙소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와야 하는 곳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는 서쪽을 보고 있었다. 장강이 거슬러 올라가는 쪽. 사흘 거리 상류의 협곡을 향해.
스무 해 전 오늘 밤이었다.
허평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절도 하지 않았고, 술을 붓지도 않았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서 있었다. 해가 떠서 그의 등을 비출 때까지.
해마다 이렇게 했다. 산속에서 열아홉 번. 올해는 처음으로 무림맹 언덕에서였다.
해가 다 떠오르자, 그는 돌아서서 언덕을 내려갔다. 출근할 시간이었다.
보름 사이 민원실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벽에 걸린 처리율 두루마리의 마지막 칸에는 여전히 '9할 2푼'이 적혀 있었다. 왕 부총관은 그 숫자에 만족했는지, 요즘은 사흘에 한 번만 들렀다. 들를 때마다 보고서의 맨 아래 칸부터 확인했다.
[첩자 신고 접수 건수. 7.]
"일곱 건! 좋습니다. 조금씩 늘고 있어요."
왕 부총관이 주판을 튕기며 흐뭇해했다. 유진은 그 숫자를 볼 때마다 입을 다물었다.
새 민원도 몇 건 들어왔다. 개울 다리를 부순 비무, 밭을 짓밟은 경공 연습. 허평은 하나씩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뒤로 며칠씩, 이상하게 밤잠을 설쳤다.
장연이의 편지는 여전히 액자 옆에 붙어 있었다. 곽 주임의 '검토 중' 도장은 여전히 서랍 안에 있었다.
그리고 추가찻집 뒤 창고에는, 봉인된 상자 하나가 여전히 열리지 않은 채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허평은 밤마다 그 앞에 잠깐 섰다가 돌아왔다. 아직 한 번도 끈에 손을 대지 않았다.
평온한 오후였다.
창밖에서 봄볕이 마당에 늘어져 있었다. 민원인은 없었다. 곽 주임은 접수창구에 턱을 괴고 졸고 있었다. 유진은 지난 민원서를 정리했고, 마 영감은 서고 앞에서 먼지를 털었다. 허평은 자기 책상에서 붓 연습을 하고 있었다. 왕 부총관의 반려를 더 이상 받지 않으려고 시작한 연습이었다. 나아진 것은 없었다.
곽 주임이 졸다가 꾸벅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눈을 반쯤 뜬 채, 아무도 없는 창구를 향해 장난스럽게 외쳤다.
"맹주님~ 민원 들어왔습니다~"
유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임님,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 내 말은~ 저 액자 말이야."
곽 주임이 턱으로 벽을 가리켰다. 초대 맹주의 어록. '무림맹은 백성의 방패다.'
"맹주님이 그렇게 백성 생각을 하셨다면, 민원이 들어오면 맹주님한테 보고를 해야지. 안 그래? 그래서 내가 대신 보고하는 거야. 맹주님~ 민원 들어왔습니다~ 하고."
"맹주님이 민원실에 오실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농담이지. 살아 계셨어도 안 오셨을걸. 이런 데를 누가 와."
유진이 깔깔 웃었다. 서고 앞에서 마 영감의 먼지떨이가 잠깐 멈췄다.
허평도 웃었다.
조금 늦게.
그때 민원실 문이 열렸다.
노인 하나가 문간에 서 있었다.
아주 마른 노인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깊었다. 성긴 백발을 천 조각으로 묶었고, 기운 삼베옷을 입었다. 발에는 닳고 닳은 짚신을 신고 있었다. 짚신 앞코가 해져 발가락이 보였다.
노인은 가슴에 보자기 하나를 안고 있었다. 작은 보자기였다. 그 안에 종이 한 장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곽 주임의 웃음이 멎었다.
"…아."
곽 주임은 그 얼굴을 알았다. 해마다 이맘때 오는 노인이었다. 이름은 몰랐다. 해마다 같은 민원서를 내밀었고, 해마다 곽 주임은 그것을 베껴 사본을 남기고, '검토 중'을 찍고, 원본을 돌려주었다. 그게 정해진 절차였다. 이 노인의 민원은 그렇게 하라고, 위에서 정해 주었다.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창구로 걸어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창구 앞에 서서, 떨리는 손으로 보자기를 풀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종이는 낡을 대로 낡아 있었다. 접힌 자리가 닳아 거의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귀퉁이마다 붉은 도장이 빼곡했다. 열여덟 개의 '검토 중.' 도장 위에 도장이 겹쳐 찍혀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
"올해도 왔소."
노인이 말했다. 목소리가 가늘고 떨렸다. 단어 사이에 숨이 섞였다.
"오늘이… 그날이라."
곽 주임은 대답하지 못했다.
유진이 일어나 창구 쪽으로 왔다. 그리고 노인이 내민 민원서를 내려다보았다.
이름 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청석촌 늙은이.]
글씨는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글을 몰랐다. 종전 이듬해 첫 기일, 본청 문 앞에서 쫓겨나던 날 지나가던 누군가가 대신 써 준 글씨였다. 그 사람은 노인의 이름을 묻지 않고 그렇게 적었고, 노인은 그 뒤로 이름을 다시 말하지 않았다.
민원 내용은 한 줄이었다.
[흑수곡 아래 청석촌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 주십시오.]
허평의 붓이 멈췄다.
종이 위에 먹 한 방울이 떨어졌다. 번졌다.
흑수곡. 청석촌.
그의 눈앞에 불빛이 떠올랐다. 강을 따라 점점이 박혀 있던 작은 불빛들. 하나, 둘, 셋. 둑 위에서 본, 마지막 하나가 꺼질 때까지 본 불빛들.
스무 해 전 오늘 밤의 불빛들이었다.
서고 앞에서 마 영감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먼지떨이를 든 손이 내려가 있었다.
곽 주임이 습관처럼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검토 중' 도장이 있었다. 장연이의 편지가 붙은 날 넣어 둔 도장이었다. 열여덟 해 동안 해마다 이 노인에게 찍어 주던 도장이었다.
곽 주임의 손이 도장 위에서 멈췄다.
그는 허평을 보았다.
허평은 일어서 있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는 창구 앞에 서서 노인의 민원서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이상했다. 곽 주임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주 오래전, 아주 먼 곳에서.
곽 주임은 손을 거두었다. 서랍이 조용히 닫혔다.
허평이 두 손을 내밀었다.
노인의 민원서를, 두 손으로 받았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노인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서기였다. 반백의 머리, 마른 얼굴. 노인은 무언가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허평이 고개를 숙였다. 아주 깊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민원실이 조용했다. 유진이 숨을 멈췄다. 곽 주임이 의자 등받이를 쥐었다.
허평이 고개를 들었다.
"이 민원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노인은 한참 동안 그를 보았다. 열아홉 해 동안 이 창구 앞에서 수없이 들은 말이 있었다. 검토 중입니다. 기다리십시오.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번 말은 그 어느 것과도 달랐다.
노인의 마른 입술이 떨렸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스무 해를 걸어온 사람은 쉽게 울지 않았다.
"…서기 양반."
"예."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허평입니다."
노인은 그 이름을 입속으로 한 번 되뇌었다.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에게 그것은 그저 처음으로 '처리하겠다'고 말한 서기의 이름이었다.
"어르신 성함은 무엇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청석촌 늙은이요. 그거면 되오. 그 마을 사람은 이제 나 하나뿐이니."
노인은 빈 보자기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돌아섰다. 민원서는 두고 갔다.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노인이 돌아간 뒤에도 민원실은 한동안 조용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진이었다.
"주임님, 청석촌이 어디예요?"
곽 주임은 한참 창밖을 보다가 대답했다.
"흑수곡 아래 있던 마을이야. 스무 해 전, 정마대전 마지막 싸움이 흑수곡에서 났잖아. 검성께서… 초대 맹주님께서 상류의 둑을 터뜨려서 현천교 본대를 막으셨지. 그리고 현천교주를 쓰러뜨린 다음, 절벽 아래로 떨어져 돌아가셨고."
유진도 아는 이야기였다.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때 둑 아래 마을이 물에 잠겼어. 그게 청석촌이야. 기록에는 '전쟁 중의 안타까운 사고'라고 돼 있지. 그러니까 내 말은~ 다들 그렇게만 알아."
곽 주임은 서랍을 내려다보았다.
"그 노인 민원은 처음부터 위에서 정해 준 대로 처리했어. 원본은 돌려주고, 사본만 남겨서 '검토 중' 찍고, 그날 저녁에 총관부로 올리라고. 흑수곡 관련은 다 그렇게 하라는 내규가 있어."
"왜요?"
"몰라."
곽 주임이 쓴웃음을 지었다.
"열여덟 해 동안 한 번도 안 물어봤어. 물어보면 내가 그 노인 얼굴을 못 볼 것 같아서."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허평은 노인의 민원서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종이의 접힌 자리를 조심스럽게 펴고 있었다. 마 영감이 서고 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노인의 눈이 젖어 있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곽 주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허 서기, 그런데… 사본은 오늘 저녁에 올려야 하는데."
허평이 고개를 들었다.
"원본이 여기 있습니다."
"…응?"
"원본을 돌려드리지 않았으니, 사본을 만들 일이 없지요. 내규에는 사본을 올리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곽 주임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는 한참 허평을 보다가, 결국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허 서기 말이 맞다는 거지."
그날 저녁, 민원실에서 총관부로 가는 서류 상자는 비어 있었다.
그날 밤, 본청 꼭대기.
장로 집무실 가운데 가장 높은 방에서 한 노인이 찻잔을 들고 있었다. 짙은 녹색 비단옷, 단정한 회색 수염, 온화한 미소. 총관부를 맡은 장로, 도위경이었다.
총관부 서리 하나가 문 앞에 엎드려 보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원실 건입니다. 매년 사월 보름에 오는 청석촌 청원 말입니다."
도위경의 찻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
"올해는 그것이 '검토 중' 없이 민원실에 남았다고 합니다. 원본을 돌려주지 않았고, 사본도 아직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그날 저녁이면 꼬박꼬박 올라오던 것인데…"
서리는 말끝을 흐렸다. 장로의 얼굴을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다.
방 안이 조용했다.
도위경은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찻잔 바닥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창밖으로 본산 뒤편이 내려다보였다. 그 구석에 기와 몇 장이 빠진 낡은 단층 건물이 있었다. 그가 열아홉 해 전에 만든 곳이었다.
"민원실에…"
도위경이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느렸다.
"사람을 하나 붙여 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