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제 직전으로 붙었습니다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아니라 하늘이 통째로 쏟아지는 비였다. 흑수곡의 좁은 협곡은 물소리로 가득 찼고, 둑 위에 선 사내의 투구 끝에서 빗물이 쉬지 않고 떨어졌다.
검은 철 면갑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젖은 갑옷과, 검 손잡이를 쥔 손뿐이었다.
둑 아래 상류 쪽에서는 횃불 수천 개가 계곡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현천교 본대였다. 저 불빛이 협곡을 빠져나가면 그 뒤로는 막을 것이 없었다.
"맹주님."
등 뒤에서 연락 총책이 빗속을 뚫고 외쳤다.
"하류 청석촌, 피난은 끝났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검이 그은 것은 한 줄이었다. 빗소리보다 조용한 한 줄.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둑 한가운데가 소리 없이 갈라지더니, 그 틈으로 검은 물이 터져 나왔다.
물은 협곡을 삼켰다. 횃불이 하나씩, 그러다 한꺼번에 꺼졌다.
그리고 하류에서도 불빛이 꺼졌다.
강을 따라 점점이 박혀 있던 작은 불빛들이었다. 하나, 둘, 셋. 마지막 하나가 꺼질 때까지, 사내는 검을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불빛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아는 데는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스무 해가 지났다.
종전 스무 해째 봄, 음력 삼월 초이틀.
무림맹 본산은 무창성 동쪽 언덕에 있다. 붉은 기둥, 회색 기와,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 그 계단 아래 마당에 올봄 말단 채용 시험을 보러 온 지원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스무 살 안팎이었다. 문파에서 갓 하산한 제자, 세가의 둘째 셋째 아들, 시골 무관에서 올라온 청년들. 다들 새 무복을 입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반백의 사내가 하나 앉아 있었다.
짧게 묶은 상투는 절반이 회색이었다. 수염은 짧게 다듬었고, 얼굴은 마르고 평범했다. 빛바랜 회색 무명옷 허리띠에 붓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시험관들은 그를 누군가의 아버지로 알았다.
"아드님 자리는 저쪽입니다. 보호자분은 담장 밖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제가 보는 겁니다."
"…예?"
"시험이요. 제가 봅니다."
시험관은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명부를 들여다보고, 다시 사내를 보았다.
이름을 확인하던 채용 담당이 피식 웃었다.
"허평(許平). 초대 맹주님과 이름이 같네요."
"흔한 이름이라서요."
"하긴." 채용 담당이 붓으로 이름 옆에 점을 찍었다. "살아 계셨어도 맹주님이 이런 데 오실 리가 없지요."
"그렇지요."
허평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옆자리 지원자가 힐끔 보았다. 남색 무복에 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묶은 젊은 여자였다. 허리에 가는 검을 찼고, 앉은 자세에 흐트러진 데가 없었다.
"늦깎이세요?"
"많이 늦었지요."
"이 시험, 보통은 서른 넘으면 안 받아 주던데."
"나이 제한은 없더군요. 확인해 봤습니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유진이에요. 유가장."
"허평입니다."
"아까 들었어요. 맹주님이랑 이름 같으신 분."
유진은 웃지 않았다. 대신 앞을 보며 작게 덧붙였다.
"저는 수석 할 거예요. 수석은 본청 배치거든요."
허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관례는 그 반대쪽이었다. 말단 채용의 최하위 합격자는 관례상 민원실로 간다.
'수석은 본청. 꼴찌는 민원실.'
그가 노리는 자리는 꼴찌였다.
첫 시험은 무공이었다.
목검 한 자루씩을 받아 들고 연무장에 섰다. 시험관이 말했다.
"초식은 자유. 자기가 익힌 것 중 가장 자신 있는 것을 보이시오."
지원자들이 차례로 나섰다. 누구는 목검으로 바람 소리를 냈고, 누구는 공중제비를 돌았다. 유진의 차례에는 시험관 셋이 동시에 붓을 멈췄다. 목검 끝이 일곱 번 꺾이는 동안 발이 한 번도 땅을 끌지 않았다.
그리고 허평의 차례가 왔다.
허평은 목검을 쥐었다.
손이 익숙한 무게를 찾았다. 스무 해 동안 쥐지 않은 무게였다. 손끝이 아주 잠깐, 아무도 모르게 굳었다.
'초급. 초급 기본형.'
그는 목검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찌르고, 거두고. 무관에 입문한 지 석 달 된 아이들이 매일 아침 하는 바로 그 동작이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붙을 만큼만.
동작이 끝나자 연무장이 조용했다. 누군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다.
시험관이 헛기침을 하고 붓을 놀렸다.
"나이에 비해 기본은 있군."
"감사합니다."
허평이 목검을 돌려주었다. 시험관은 몰랐다. 그 기본형이 한 치도 흔들림이 없었다는 것을. 마지막에 거둔 목검 끝이 처음 자리와 털끝 하나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을.
유진은 알았을까. 그녀는 잠깐 허평의 손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둘째 시험은 필기였다.
시험지가 돌았다. 문제는 한 줄이었다.
[무림맹 설립 이념을 서술하시오.]
여기저기서 붓이 바쁘게 움직였다. 다들 외워 온 문장이 있었다. 맹의 창설 선언, 초대 맹주의 어록, 정마대전의 교훈. 유진은 거침없이 석 장을 채웠다.
허평은 붓을 들고 오래 앉아 있었다.
설립 이념.
그는 그것을 알았다. 누구보다 잘 알았다. 스물세 해 전, 무너지는 정파 문파들을 한자리에 모으며 그 자신이 한 말이었으니까.
'무림맹은 백성의 방패다.'
그 말을 할 때 그는 서른둘이었다. 확신이 있었다. 방패는 가볍고, 백성은 그 뒤에 숨으면 된다고 믿었다.
허평은 붓 끝에 먹을 찍었다. 그리고 한 줄을 썼다.
[백성의 방패가 되겠다고 했는데, 방패가 너무 무거워진 것 같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채점관은 그 시험지를 세 번 뒤집어 보았다. 앞에도 뒤에도 그 한 줄뿐이었다. 게다가 글씨가 지독했다. 지렁이가 먹물에 빠졌다 기어 나온 것 같았다.
채점관은 시험지 귀퉁이에 적었다.
[설립 이념을 전혀 모름.]
그리고 최하점을 주었다.
그날 저녁, 본청 앞 게시판에 합격자 명부가 붙었다.
맨 위에 이름이 하나, 맨 아래에 이름이 하나 있었다.
[수석. 유진.]
[최하위. 허평.]
그리고 그 두 이름 옆에, 똑같은 배치처가 적혀 있었다.
[총관부 외무과 피해구제소.]
"…이게 뭐예요?"
유진이 게시판 앞에서 굳어 있었다. 저녁 햇빛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비췄다.
"피해구제소요. 다들 민원실이라 부르더군요."
어느새 옆에 선 허평이 말했다.
"그건 아는데요! 수석이 왜 민원실이에요?"
지나가던 하급 무사 둘이 수군거렸다.
"그 여자잖아. 시험 기간에 외당 오 장로님 아들을 때린."
"하급 무사 괴롭히는 걸 보고 그랬다며. 맞은 쪽이 장로님 아들인 줄 알았으면 안 그랬겠지."
"알고 그랬대."
유진이 고개를 홱 돌리자 두 사람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게시판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알고 그랬어요. 잘못한 건 그쪽이니까."
"그럼 잘하신 겁니다."
유진이 허평을 보았다. 허평은 게시판의 자기 이름을 보고 있었다. 맨 아래, 최하위. 그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아쉬움이 없었다.
"…아저씨는 안 억울하세요?"
"저는 붙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다음 날은 첫 출근이었다.
본청 대청을 가로지르는 길에, 사람 키 두 배는 되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갑옷 차림의 사내가 검을 짚고 서 있었다. 눈썹은 칼로 그은 듯 짙고, 콧날은 우뚝하고, 턱선은 바위를 깎은 것 같았다. 그림 아래 금박 글씨가 있었다. [초대 맹주 검성(劍聖) 허평.]
유진이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았다.
"이분이 초대 맹주님이세요. 천하제일 미남이셨대요. 전쟁 때는 늘 면갑을 쓰셔서, 얼굴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지만."
"그럼 이 그림은 누가 그렸습니까?"
"…상상으로요?"
허평은 그림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림이 잘 나왔네요."
"아저씨랑 이름은 같은데 얼굴은 영 다르시네요."
"다행이지요."
유진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허평은 이미 대청을 지나 걷고 있었다.
민원실은 본청 뒤편 구석에 있었다. 대청을 빠져나와 붉은 기둥들 사이를 지나고, 집법전 담장을 돌고, 하급 무사들의 빨래가 널린 마당을 가로지른 끝에, 기와 몇 장이 빠진 낡은 단층이 하나 있었다.
문 위에 현판이 걸려 있었다. 누가 썼는지 몰라도 글씨가 반쯤 지워져 '피해구'까지만 읽혔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지 냄새가 났다.
책상 넷, 접수창구 하나. 그중 한 책상에 배가 둥글게 나온 사내가 턱을 괴고 졸고 있었다. 짙은 남색 관복의 단추 하나가 풀려 있었다.
인기척에 사내가 실눈을 떴다.
"아, 새로 온 사람들이구먼. 내가 주임이야. 곽춘삼. 그러니까 내 말은~ 환영한다는 거지."
곽 주임은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허평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이쪽은… 신입이 아니라 민원인인가?"
"신입입니다. 허평이라고 합니다."
"허 서기라." 곽 주임이 턱을 긁었다. "허허실실이구먼. 허술해 보이는데 속은 모르겠다, 이거지. 하하. 잘 왔어, 허 서기."
유진이 한숨을 쉬었다. 이곳의 공기를 벌써 파악한 얼굴이었다.
그때 안쪽 서고 문이 삐걱 열렸다.
굽은 허리의 노인이 먼지떨이를 들고 나왔다. 먼지 묻은 회색 수염, 손끝에는 먹물이 배어 있었다.
"마 영감님이야. 서고 담당. 귀가 좀 어두우셔."
곽 주임이 크게 소리쳐 소개했다.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먼지를 털다가, 허평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허평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먼지떨이를 쥔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러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허리를 한 번 더 굽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서고로 돌아갔다.
"…원래 저런 분이세요?"
유진이 물었다.
"원래 인사를 안 하시는데. 허 서기가 마음에 드셨나 보네."
허평은 서고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여전히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벽으로 옮겨 갔다.
벽 한가운데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먹 글씨가 반듯하고 힘찼다.
[무림맹은 백성의 방패다. ― 초대 맹주 허평]
허평은 그 앞에 섰다.
곽 주임이 보고는 웃었다.
"그거? 이 방에서 제일 좋은 물건이야. 맹주님 어록. 우리 같은 데 걸어 두면 백성들이 좀 위로가 된다나. 하하. 위로는 무슨, 민원은 다 '검토 중'인데."
허평은 대답하지 않았다.
액자를 한참 보다가,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저런 말을 했었지.'
그리고 덧붙였다.
'글씨는 내 게 아니고.'
그때였다.
민원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한 아주머니가 서류 한 장을 움켜쥐고 들어와, 접수창구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이 붉게 부어 있었다.
"이번에도 검토 중이면… 이번에도 검토 중이면 저는 정말…"
말을 맺지 못하고, 아주머니는 울기 시작했다.
곽 주임이 습관처럼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그 안에 '검토 중' 도장이 있었다.
허평이 먼저 창구로 걸어갔다.